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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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숙

작가 작품

5월의 소나무

소나무,석고, 20x30x50cm, 1998

2회 이윤숙개인전(자유에 대한 희구) 전시장면

1987

1998년의 자소상

100여년된 소나무뿌리, 석고, 120x120x240cm, 1998

meditation2007-6

bronze, 35x22x40cm, 2007

Wake up! Dream I

62x62x147cm, oak, glass, bronze, 1993

Wake up! Dream II

62x62x145cm, oak, glass, bronze, 1993

단단한 의혹

bronze, 19x13x28cm, 2002

명상-삶에 대하여(부분)

bronze, 가변설치, 2007

인간의 모태-침묵속에서 음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II

함석, 물, 무쇠솥뚜껑, 1990, 3회 이윤숙 개인전 전시장면

장수하늘소-더듬이

320x50x127, bronze, stone, 밤나무고목, 1990

명상-생명의 싹

bronze, 화강석, 330x320x430cm, 2008
서울 강남 성모병원

사랑이 머무는 자리

화강석, 360x360x160cm, 2007
원주시 단계동 이안아파트

자연, 인간 하나되기-파도이야기

화강석,상주석,마천석, 550x420x180cm
수원화서 위브하늘채

자연과 인간-하나되기

화강석,마천석, 365x190x170cm, 2007
두산 위브

자연의 축

bronze, 1996, 500x200x460cm
수원 한일타운

작가 프로필

개인전
2019 『솥뚜껑의 변주』예술공간 봄, 수원
2018 『소소한 조각전』예술공간 봄, 수원
2018 『예술정치-무경계 프로젝트 2018 : 기억과 공감 “바람-온새미로”』고색뉴지엄, 수원
2017 『슈룹 2017예술정치-무경계 프로젝트 “바람”』실험공간UZ, 뽈리화랑, 수원
2015 『비창- 그녀들의 방』 예술공간봄, 수원
2015 『명상-이윤숙 조각 다시보기전』 예술공간봄, 수원
2015 『명상-삶에 대하여』북수원지식정보도서관 초대전(북수원지식정보도서관 갤러리, 수원)
2007 『명상(meditation)-삶에 대하여』큐브 스페이스, 서울 / 대안공간 눈, 수원
2004 『숨·쉼』소나무s갤러리, 안성
2000 『대희년의 기쁨이여!』 슈룹조형연구소, 화성
1998 『1998년의 자소상』아트넷갤러리, 수원 / 슈룹조형연구소, 화성
1997 『명상-삶의 에네르기』아트넷갤러리, 수원
1996 『자연의 축-모태』바탕골미술관, 서울 / 슈룹아트넷, 수원
1993 『참아라! 참나무』장안갤러리, 수원 / 바탕골미술관, 서울
1990 『모태 - 음과 양』소나무갤러리, 서울
1987 『자유에의 희구』바탕골미술관, 서울
1985 『음과 양』청년미술관, 서울

주요 단체전(1983~2020 단체전 600여회)
2019 경기아트프로젝트 시점시점 - 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경기도미술관, 안산)
2019 예술정치-국제무경계프로젝트 온새미로(예술공간 봄, 수원)
2017 그것은 바로 그것이 아니다-1980~1990년대 수원의 실험미술(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수원)
2009 인천 국제 여성미술 비엔날레-조율전(인천 아트플랫폼, 인천)
2005 제 1회 금강 자연미술 비엔날레(장군봉자연미술공원, 공주)

수상
2012 수원시문화상(예술부문) 수상
2011 대한민국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 수상 (대안공간눈)
1987 제5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한국미술협회)
1986 제4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한국미술협회)
1985 제3회 청년미술대상전 입선 (한국미술청년작가회)
1984 제7회 중앙미술대전 입선 (중앙일보사)
1983 제1회 청년미술대상전 입선 (한국미술청년작가회)

주요 경력
2011~현재 : 행궁동 예술마을만들기와 도시재생 관련 강의
2009~2019 : 행궁동레지던시 총감독
2005~2019 : 대안공간 눈 대표
2010~2018 : 이웃과 공감하는 예술프로젝트 ‘행궁동사람들’ 총감독
2014 : 국제협업아트프로젝트 - 신화와 예술 맥놀이 총감독

작가 노트

								

평론


                    집단적 무의식을 환기시키는 치밀한 상징체계

이 윤숙의 작품들은 모종의 신비감을 주고 있다.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흡입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그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여류작가라는 사실이나 독특한 구상력과 연출 재능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 말고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 많다. 이는 곧 거대한 스케일과 비의적 연출에 의한 설치, 정적이면에 감도는 리비도의 소용돌이, 음미할수록 깊은 맛을 주는 서술성과 상징성등이 시율로 어우러진 하나의 앙상블이라고 할까, 그러한 가운데 섬세함도 또한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낯익음과 낯설음, 자연성과 작위성, 옛 것과 새로운 것,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침묵과 웅변, 공허와 충만등 다양한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이 넘침이나 모자람이 없는 중용적 균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작가의 조형적 성숙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설치작품인 "인간의 모태-침묵 속에서 음은 모든 것은 포용한다"를 보자. 우주를 상징하는 것 같은 지름 6m정도의 둥근 테로 둑을 만들어 그 안에 물을 채우고, 과거 우리의 삶 속에서 실재 사용된 적이 있는 여러 개의 솥뚜껑들을 덮은 채 담아두고 있다. 할로겐 조명으로 말미암아 끈끈한 정적이 짓누르고 있는 가운데 솥뚜껑은 여인의 젖가슴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고, 솥뚜껑을 촉촉하게 적셔주고 있는 물은 양수 혹은 그 밖의 분비물로 상징된다. 여기서의 물이 공간 속에서는 만물생성의 원천으로 의미되지만, 시간속에서는 그 자체가 철 산화요인이 되어 사물의 피할 수 없는 엔트로피를 야기한다는 명제적 기호로 주어진다. 결국 여기서의 명제 내용은 현상으로서의 이질적인 생성과 소멸은 본질적으로는 일치하는 것임을 깊이 사색한 결과라 해야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징체계는 리비도가 인간의 모든 문화에 있어 가장 근원적인 추동력이라는 정신분석학적 입장을 논증적 기호로 전달하기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조각작품 "장수하늘소-더듬이'이다. 장수하늘소의 식욕에 의해 파헤쳐진 밤나무 고목에 브론즈를 가하고 자연석으로 받침대를 이루고 있는 작품은 선사시대의 거석분묘와 같은 형상으로 태고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어 일으키는가 하면, 발기된 남근의 이미지를 띠면서 원초적인 리비도의 충동을 발산시텨나가고 있다. 한편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확실치않으나 그 맞은 편에는 파괴된 솥뚜껑이 브론즈로 재구성된 "모태"라는 연작들은 대응적인 자궁 형상을 자아내고 있다.(여기서도 또한 파괴가 곧 소멸을 일컫는 것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다.)이는 남근숭배의 의식을 표명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이드(id)의 잠재적 충동을 문화의 추동력으로 간주하는 시각의 표명이라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복합적인 서술체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낯익음과 낯설음을 동시에 경험시켜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까닭은 우리의 집단적 무의식으로부터 야기된 원형적 서정이 물낀 풍겨나오는 대상들을 개재한데서 낯익음이 나타나며, 한편 낯설음은 이 시대 문명의 언저리에 처한 그 대상들을 중심으로 한 연출이 전혀 새로운 경험을 야기한다는 데 기인하기 떄문이다. 이렇듯 복합적인 경험들이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대상적 국면은 서정의 측면으로부터 사변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내재적인 미적 체험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윤숙의 작품세계를 통해 우리 미술의 질서에 있어 예감된ㄴ 새로운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과거 새로움의 추구와 교조화되어 있는 상황을 극복하고 더욱 개방적이면서도 주체에 대한 시각을 회복시켜 나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역사적 필연이라는 것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통시적인 집단적 동일성과 공시적인 집단적 동일성 및 지역적 관습체계를 현대사회의 맥락에서 규명하고자 하는 조형적 노력은 작가의 자발적인 자각과 의지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인만큼 각별한 주목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야말로 일괄적인 현상이 아닌 장차 우리 현대미술의 정당하고도 항구적인 자리 매김 내용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미술평론가 이 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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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숙(LEE,YOUN-SOOK)의 범자연주의적 휴머니즘

조각가 이윤숙은 가끔 만날 때마다 농사 짓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고 말하곤 한다. 농사에 관한 한 작가는 좋은 의미에서의 딜레땅티즘으로 충만해 있는 것 같다. 재미로 농사를 한다면 전업 농군은 아니다. 전업 농군이 농사의 재미를 말하는 것을 본 일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동안 보여온 작업의 에너지와 열정을 감안할 때, 정말 예상 밖으로 농사일에 전념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작가만큼 자연에 애착을 가진 작가도 그리 흔치 않으니 말이다. 더욱이 작가의 작업 기조(基調)가 주로 생태론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그 말은 곧 자신의 일상에 대한 우연적인 언급이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의 작업 전체를 시사하는 진지한 미학적 고백의 진술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십 수년 전부터 화성 봉담에 터를 잡아 전원생활을 해온 작가는 자신의 조각 작업과 농사일을 하나의 근본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간주해 온 듯하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조각에 생태적 문제를 담아 오면서, 자연스럽게 범자연적 휴머니즘이 창작의 모토가 되었던 것이리라. (작가의 개인 홈페이지 표지에 열심히 농사 일에 몰입해 있는 모습의 사진이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은 단순한 농업적 생산의 행위가 아니라, 어떤 성찰과 깨달음에 몰두할 수 있는 하나의 구도적 과정으로 설명되고 있는 듯하다.)
은둔자와 같은 전원생활을 한다 하여 작가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거나, 폐쇄된 자의식만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생활 속에서 체험으로 주어진 것들을 여과 없이 그대로 작업으로 만개(滿開)시켜 가면서도, 많은 작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지역사회의 현안에 대한 연구와 계몽 등의 활동을 부단히 병행해 왔던 터이다. 실제로 그의 작업실은 지역 작가들이 모이는 하나의 기지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결과로 수원 지역의 많은 작가들이 오랫동안 보여온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언가 끈끈하게 결속되어 생명과 환경, 역사와 전통, 삶과 예술 등의 다양한 과제와 명제를 놓고 치열하게 움직여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10년 넘게 지속되면서 수원지역의 미술은 서울의 주변이 아니라, 서울과는 또 다른 독자성을 가진 하나의 미술문화를 일구고 수원 고유의 전통으로 정착시켜 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움직임들 속에 작가가 중심적 역할을 해 왔다는 점에 이견이 없는 듯하다.
작가는 조각가로서 매스와 전통적인 고형(固形) 재료를 통한 조각을 해오면서도 필요에 따라 다양한 연출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 연출은 전시장 내부 만이 아니라 발길이 닫는 자연 모두가 대상이다. 직접 산에서 수거한 폐목들을 활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산 속 현장에 이벤트 연출을 하는 등의 다양한 작업이 그것이다. 요컨대 작가의 작업은 곧 생활이며, 자신의 생각이자 신앙이며, 가장 가치 있는 발언이자 사회적 참여의 행위이다. 생활에 기초한 예술은 근본적으로 작품에서의 유기적 생명력과 유연한 미의식을 가능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경우도 조각에 대한 교조적인 신념에 빠져 있다거나, 혹은 기성의 것에 대해 해체적인 태도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없다. 유연하고 신축적인 조형에 대한 입장, 그것은 비단 작품 형식의 문제만이 아닌 관객과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작품의 과정이나 작품의 의도에 참여하게 하는 미학적 전략을 생략한 적이 거의 없다.
특히 '숨쉼'이라는 주제를 가진 이번 전시에서 선보일 이벤트는 이러한 유형의 입체적인 연출의 종합편과도 같다. 전시장 옥외에 나무토막들로 만들어진 인체 좌상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나무토막들을 쌓아두고 관객들이 스스로 조형에 참여하는 이벤트를 갖게 된다. 관객들이 작업에 스스로 참여케 하고 아울러 재미를 느끼게 하는 이벤트로서 현대미술이 고답적이고 현학적인 관념의 놀이가 아니라, 이렇게 참여하고 스스로 제작함으로써 흥미와 보람을 갖게 하는 이벤트인 것이다. (완성된 작품은 그대로 있다가 부패하게 되고 버섯과 곰팡이가 자리하게 될 것이다. 자연적 엔트로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작품의 물성 스스로가 무언가를 말하게 된다. 자연이 스스로 자연되게 하는 '숨쉼'의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작업의 반은 작가가 맡고, 나머지 부분은 관객이 완성해감으로써 오늘의 동시대 미술은 관객의 주체적 참여라는 명제와 의도를 자연스럽게 인식케 한다. 또한 연못에 관객들이 부레옥잠을 하나씩 띄워주는 이벤트 역시 관객의 참여가 바로 자연의 완성이자 작품의 완성임을 자연스럽게 환기시켜 준다. 물론 여기서도 자연과 인간의 하나됨을 권유하는 금언적 서곡을 직접 육성으로 노래하는 의미가 간과될 수 없는 일이다.
근작들 가운데 비교적 조그만 브론즈 소품들이 있다. 돌의 형상, 나무 형상 등 다양한 이미지의 매스 위에 한결같이 인간의 모습이 결합되어 있다. 그 인간의 모습들은 투박하게 빚은 인간의 좌상들이나 손 이미지들이 많다. 고뇌하거나 사색하는 인간의 모습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있겠지만 작가의 의도는 그 아래에 있는 이미지의 매스와의 관계에 더 역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양식적으로는 마그리트 그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데페이즈망과 같은 결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질적인 양자의 결합은 의미의 시너지를 예상시켜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오랜 기호론을 대입시켜서 본다면 이질적 양자의 근원적 동일성이라는 세계관을 시사하는 문맥을 떠올릴 수도 있다. 작가가 어느 쪽에 역점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리라.
15년 가까이 작가를 지켜본 필자의 눈에 그는 무엇보다 가공할 에너지의 소유자라는 점이 먼저 떠올려진다. 그 에너지는 순간적인 폭발력보다는 은근하고 진득하게 지펴진 군불처럼 나타난다. 말로 잘 표현을 하지 않는 성품 때문에 마주 할 때는 그러한 에너지를 잘 느끼지 못하지만, 그의 작업실에 발을 디디기만 하면 직감적으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의 우리 조각이 지나치게 모뉴먼트에만 치중하고 있어 내용 있는 전시나 발표를 볼 기회가 많지 않다. 바로 이러한 전시활동의 양적 감소가 반드시 작업의 질과 연관된다고 믿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각만이 우리 미술문화 현장에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조각의 풍토에서 작가가 거의 20여 년 동안 아홉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는 것은 평가할 만한 일이라 본다. 우리 화단엔 경력 쌓기의 일환으로 의례적인 전시의 수량을 늘려가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작가가 그런 취지에서 전시를 하는 것이었다면 작가가 굳이 수원이라는 지역에 연연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수원은 자신의 삶의 터이자 지켜나가야 할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작가 입장에서 스스로 자기 반성의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을 터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작가의 전시활동 역시 작가의 삶과 밀접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진지하고 의미 있게 영위해가는 한 생활인으로서의 작업이기에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작가에게는 작품을 하는 행위와 그것을 보여주는 행위야말로 하나의 연못을 정화시키기 위해 행하는 이벤트와도 같다. 작가는 어느 사이 우리 사회의 진정한 교사이자 치료사의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이 재 언 (미술평론가)


제 10회 개인전 서문

명상 - 삶에 대하여 ; 정 형탁(예술학, 전시.출판기획자)

‘삶에 대하여’란 부제를 단 이번 개인전은 2004년 개인전 <숨 · 쉼>전의 흐름을 잇고 있다. 그러한 정황은 여럿 보이는데, 우선 삶, 생명, 자연을 대하는 시선의 느슨함이 그러하고 작품의 겉을 구성하는 소재의 유사성이 그러하고 단순함의 구도가 주는 서정의 두드러짐이 그러하다. 작품에서 거죽만 벗겨 놓으면 속살은 같아 보인다.

작가에게 ‘명상’이란 주제는 정확히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삶의 강박에서 잠시 탈피하기 위한 인도와 네팔 여행 이후 시작된 ‘명상’시리즈는 그해 <명상-삶의 에네르기>라는 개인전으로 태어난다. 다소 집착적인 삶의 방편, 서사적이고 계몽적인 시선이 강했던 그 이전 작품에 비하면 이 전시 이후 작품의 형식과 작가의 시선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삶을 대범하고도 의연하게 바라보는 시야의 확장’에서 온 여유로움의 시선은 2004년 아홉 번째 개인전 <숨․쉼>전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여유로움의 테두리는 ‘숨과 쉼’이 ‘목숨’과 ‘생명’의 관계와 길항한다거나 무릇 모든 숨쉬는 것은 생명의 본성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보듬는다는 점에서 작가가 지속해 왔던 주제와도 이웃한다.




이번 개인전에서 작품은 크게 병과 책의 형태를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 나뭇가지가 달라붙었다. 소주병, 맥주병, 와인병 등 실제 병을 청동으로 주조한 후 여기에 실제 새순이 한껏 차 있는 나뭇가지가 붙거나 숫제 병 자체가 나무화 된다. 또한 청동으로 만든 책의 펼친 면이나 책등에서 생명의 싹을 가진 나뭇가지가 솟아오른다. 나무와 돌 등 이전 작품들이 자연물에 토대를 두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소재의 외연이 더 커졌고 그만큼 생명이나 순환의 관계망의 지름도 커졌다.

생태학(ecology)을 두루뭉술하게 모든 생명체의 관계(relationship)의 망이라고 한다면 병이나 책이 나무와 결합하거나 나무라는 형태로 바뀌는 방식은 사실 이러한 생태학의 망을 한참 벗어난다.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나뭇가지, 이파리, 옹이 등이 생태나 생명으로 도약하는 건 도약하는 것만큼 위험하다. 오히려 병과 나뭇가지, 책과 이파리의 관계는 이질적인 만남을 유도한 달리나 마그리트 등 서구의 초현실주의자들과 가깝다. 그러나 해석학적 지평에서 작가가 지속적으로 고민해왔던 순환, 생명, 여성의 개념들과 이번 작품들을 떼어낼 수 있을까. 없다고 본다.

또한 작가가 첫 개인전에서부터 이번 개인전까지 흙, 나무, 돌 등 자연물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 전시 주제인 ‘명상’이 주는 순환과 윤회의 관점 등을 해석의 곁가지에서 일부러 도려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오히려 주목해야 할 점은 서로 멀찍한 오브제와의 만남을 통해 드러나는 사물의 계시성(epiphany)에 주목해야하는 지도 모른다.

‘병’이라는 오브제는 병의 외양을 닮은 입술소리 ‘ㅂ’과 술이 들어가는 목구멍을 닮은 목구멍소리 ‘ㅇ’으로 이루어졌다. 병이 갖는 이러한 언어적 성질과 술을 담는 그릇으로서 도구적 성질은 작가가 애초부터 지속해 왔던 자연이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기는 객쩍다. 그러나 그 어색함과 멀찍함이 오히려 병치의 효과를 살찌운다. 이 어색함은 깨진 병, 찌그러진 병, 폐기처분된 병이 나무라는 외관과 결합하면서 생기는 파장이다. 이러한 파장은 시각적 재미와 함께 환경, 생명, 순환 등 ‘대지의 드러남’을 보여주는 것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나무의 살을 깎아 만든 책이 다시 제 살을 틔운다는 순환의 논리는 사뭇 종교적 윤회나 참자아를 찾는 여정을 연상케 한다. 이는 무념이나 무상의 종교적 차원으로도 해석되나 삶의 윤회나 생명의 원리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렇듯 병, 책, 나뭇가지 등이 엮는 시각적 충돌은 인식론적 차원을 벗어나 사물의 존재론적 차원에 닿아있다. 이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작가가 그만큼 예술가로서나 생활인으로서 시선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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